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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LTE 타임] 어려운 기술, 쉬운 기술 – 한겨레 신문 구본권 기자

 
 ‘디지털 치매’라는 말이 있습니다. 부모님이나 자기 집 전화번호도 생각나지 않는 경우에 ‘내가 바보가 됐나’라는 자책을 하게 됩니다.
 하지만 의미 연관성이나 규칙을 찾을 수 없는 아라비아숫자 묶음을 많이 기억하고 있지 않다고 자탄할 필요는 없습니다. ‘아버지’ ‘어머니’ ‘막내 이모’로, 연락처를 바로 찾아내 전화를 걸 수 있는, 훨씬 우월한 능력을 보유한 데 따른 불필요한 기능의 퇴화이기 때문이지요. 자동차 구조를 모르는 여성들도 운전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게 해주는 게 진짜 기술이지요.

 

 

 오늘날 컴퓨터가 이처럼 대중화된 계기도 복잡한 컴퓨터언어를 외우지 않고, 그림을 보고 누르면 되는 그래픽사용자환경(GUI)이 도입되었기 때문입니다. 가장 뛰어난 기술은 드러나지 않고 사용되어 사용자가 그 존재를 모르게 작동하는 기술입니다.

 


 지난해 초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있는 제록스 팔로알토연구소(PARC)를 취재했습니다. 이 연구소는 그래픽사용자환경을 최초로 개발하고 태블릿PC 등 직관적 기술의 모태가 된 곳으로 유명하지요. 이 연구소의 마크 와이저 박사는 오늘날의 유비쿼터스 컴퓨팅을 처음 제시했는데, 그가 설명한 게 인상적입니다.


 
 “가장 심오한 기술은 사라져버리는 기술입니다. 뛰어난 기술은 일상생활 속으로 녹아들어 가 식별할 수 없게 됩니다.”
 사용자가 불필요한 작동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게 기술 진화의 방향입니다. 20세기 분석철학자인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와 버트런드 러셀이 쓴 <수학원리>란 책의 서문에는 “사람들이 가능한 한 생각하지 않도록 해주는 기계를 만들어오는 게 문명의 발전”이라는 통찰이 적혀있습니다.

 
 3세대 스마트폰을 쓰게 되면서 새로운 차원의 편리함을 경험하게 됐지만. 그 환경이 익숙해지면서 전에 없던 불만도 생겨났습니다. 좀더 빠른 네트워크를 이용하기 위해서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때 3G 통신망과 와이파이망을 번갈아가면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를 골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. 와이파이가 대체로 빠르지만 이동하면서 끊기는 것을 피할 수 없고, 연결되었다고 해도 수시로 느려지거나 망이 복잡해져서 수시로 다른 망으로 다시 연결되고 하다 보니, 네트워크 설정을 자주 변경해줘야 했습니다.
 
 LTE를 쓰게 되면서 끊김 없이 이어지는 빠른 속도의 네트워크를 경험하게 된 것도 편리함이었지만, 수시로 3G망과 와이파이망을 골라 가면서 무엇이 더 효과적일지를 고민하고 선택할 필요가 없게 됐다는 게 만족스러웠습니다. 기술이 게으름뱅이 천국을 만들어주는 거지요.
 이는 앞으로 통신기술의 진화방향도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. 갈수록 네트워크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게 당연하지만, 사용자들은 더 빠르고 값싼 네트워크를 선택하기 위해서 그때마다 뭔가를 고르는 행위를 할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.
 그런 단순한 조작이나 무의미한 숫자 행렬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, 디지털 치매를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.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절차는 기계에 맡기고, 사용자들은 뭔가 더 즐겁고 창조적인 것을 만들거나 즐기는 게 당연합니다.

 

구본권 <한겨레> 기자